655년(태종무열왕 2)∼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대학자.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아마 6두품 출신인 듯하다.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요,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삼문장(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삼국사기》는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하였고, 《삼국유사》에도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명(物名)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하였으니, 지금도 우리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하여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가지고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쳐서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하였다고 하여서 이것을 이두 내지 향찰의 고안이라고 함은 잘못이다. 향가표기식 방법 즉 향찰의 사용은 이미 설총 이전부터 있었으니,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문 가운데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며,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내지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에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한(文翰)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에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찬(撰)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또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하였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이〈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현종 13년(1022) 정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문묘(文廟) 동무(東?)에 신라2현이라 하여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종향(從享)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